
카렌 암스트롱은 내가 존경하는 영국의 종교학자이다. TED 강연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축의 시대', '신을 위한 변론'을 구입해서 가지고 있고 '신을 위한 변론'을 다 읽었지만 '축의 시대'는 1/3을 넘기지 못했다. 그녀의 책은 어마어마한 정보가 압축되어 들어 있는 느낌으로 의욕은 늘 앞서지만 막상 시작하면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길고 내용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책을 제대로 읽고 생각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그래서 카렌 암스트롱의 자서전을 읽어 보기로 하였다. 그녀에 대해 더 잘 알면, 책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이 책에서 카렌 암스트롱은 어린 시절 하나님을 찾고자 수녀원에 들어간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저명한 종교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풀어내었다. 그녀가 예수의 가르침과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수녀원 생활에서 느꼈던 좌절과 고통, 그리고 망가진 마음으로 세상에 나와서 경험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꾸밈없이 차분하게 서술 하였고, 어려움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다시 신앙과 화해 하고 진리를 찾게 되는 과정을 담담한 목소리로 전해준다.
높다란 나선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 그녀가 도착한 곳은 아래와 같다.
그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앙은 실천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교는 아침을 먹기 전에 스무 가지의 실천불가능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는 도덕의 미학이요 윤리의 연금술이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신화라든가 종교가 참다운 까닭은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학적 혹은 역사적인 실제에 부합해서가 아니라 생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구도라는 것은 '진리'라든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알차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옛날에 내가 한 수도 생활은 나를 오그라뜨렸지만 참다운 신앙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믿었다.
-p 456~457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문구>
내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참회를 하는 것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신을 찾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신의 현존을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위대한 영혼의 스승들이 누누이 강조했던 자아의 완전한 포기가 내게는 요원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 p 41.
인류학자와 심리학자에 따르면 삶의 터전을 옮긴 이민자는 갑자기 낯설어진 우주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집'이라는 준거점이 사라지니까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무의미해 보인다. -p 64.
나를 죽일 때 비로소 충만하고 고양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p 71
(복음서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를 꼼꼼히 읽어보면) 부활한 예수를 자신의 삶 속에서 역동적 존재로 체험했고 예수와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삶으로 영혼의 이동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을 묘사하기 위한 신화적 시도라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다. -p 79
신앙의 통찰은 합리적 분석이나 역사적 분석으로 요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p 80
나는 남들이 맨날 떠드는데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물'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고 엄마한테 물어보는 이슬람 우화에 나오는 어린 물고기 같았다. -p 121
성자가 경험한 황홀경과 무아지경은 내가 경험한 지옥의 환각만큼이나 공상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p 123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 속에 있다가 별안간,
평소에 하던 대로 걷고 말하다가,
나는 유령들의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고,
나 자신이 꿈의 그림자처럼 여겨졌다.
- 테니슨의 시 [공주] 중에서
"모든 것이 빠짐없이 있으면서도 없는" 그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p 174
사랑의 섭리라는 것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p 205
그런 엄격한 의식을 지내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앙을 지키려면 결국 예배에 꾸준히 참석해야 한다. - p 273
신앙이 없는 사람이 기독교 신비주의자와 똑같은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면, 초월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 초자연적 현상은 아니라고 봐야 맞을 것 같았다. -p 290
불현듯, 마침내, 파편처럼 나뒹굴었던 조각들이 의미 있는 전체로 짜 맞추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수한 기쁨, 충족과 평화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세상이 갑자기 달라 보이면서, 너무나 자명하지만 좀처럼 표현이 안 되는 그 궁극의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신이로구나 싶었다. -p 312
내가 경험한 바로는 확신은 사람을 냉정하게, 잔인하게,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p 351
내로라하는 세계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큼 몸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도 드물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세상을 구제하려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몸을 빌렸다고 말할 수 있다. 몸과 관련이 있는 것은 하나같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야 마땅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교회는 성스러움과 거룩함을 하나로 묶는 작업 앞에서 두 손을 들어 버렸고, 몸을, 특히 여자의 몸을 혐오하는 결벽주의를 발전시켰다. -p 374
예수가 애당초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려는 마음이 없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초창기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을 폐쇄적인 유대교의 한 종파로 보았다. 그 신앙을 로마 제국의 비유대교 지역에 퍼뜨린 것은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도 바울로였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도 예수의 신성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이 말은 어디까지나 유대교 전통에 따라서 쓴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p 395
사도 바울로가 쓴 편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이며 복음서는 모두 바울로가 죽고 나서 바울로가 생각한 기독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의 손으로 씌여졌다 바울로가 복음서를 비틀기는커녕 복음서가 바울로한테서 한수 배운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예수는 바울로가 우리한테 가르쳐준 예수일 뿐이었다. -p 396
"이교도 몇 사람이 힐렐한테 와서, 자기들이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유대교의 가르침을 전부 암송해 보이면 자기네가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듣고 힐렐이 황새처럼 외다리로 서더니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너희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한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유대교 경전 토라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주석에 불과할 뿐. 가서 배우라.'"
-p 400
"'바른 믿음' 보다는 '바른 행동'을 중시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가 어떻고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만, 생각을 어떻게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건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시 같은 것에 불과한 거니까요. 우리 유대인은 무얼 믿느냐에는 개의치 않아요. 그저 할 뿐입니다." -p 402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 하고 예수한테 질문을 던진 것은 그저 예수를 덫에 빠뜨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예시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논쟁도 엄연히 예배의 한 형식이었다. -p 415
영웅은 낡은 세상과 낡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도도 없고 뚜렷한 발자취도 없는 미지의 어둠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남의 괴물과 싸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괴물과 싸우고 자기의 미궁을 탐색하고 자기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기 삶에서 빠져 있었던 것을 결국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거듭나야만 자기가 두고 온 세상에도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안겨줄 수 있다.
성배 신화는 서양인의 정신 발전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그었다. 그것은 십자군 정신을 뒤집어버렸다. 십자군 기사들이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면 성배를 찾아 나선 기사들은 숲에서 외로운 탐구에 나섰다. 성배를 찾는 기사가 당도하려는 곳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상의 도시가 아니라 사라스라는 이 세상에는 없는 천상의 도시다. 숲은 영혼의 내밀한 영역을 상징하며 성배는 신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상징한다. 성배 전설이 유럽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3세기 무렵이면 서양인이 좀 더 원숙한 기독교의 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p 454
그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앙은 실천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교는 아침을 먹기 전에 스무 가지의 실천불가능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는 도덕의 미학이요 윤리의 연금술이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신화라든가 종교가 참다운 까닭은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학적 혹은 역사적인 실제에 부합해서가 아니라 생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신화와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끌어와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영웅 신화의 역할은 행동으로 나서도록 사람을 자극는 데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영웅을 일깨우는 데 있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구도라는 것은 '진리'라든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알차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브라만 사제가 지나가다가 붓다한테 당신은 신이요 유령이요 아니면 천사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어느 것도 아니며 "나는 깨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옛날에 내가 한 수도 생활은 나를 오그라뜨렸지만 참다운 신앙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믿었다.
-p 456~457
하나의 교리만을 금과옥조로 떠받들면서 나머지는 모두 불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그랬다가는 좋은 것을 많이 잃을 것이다. 아니, 세상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신은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으므로 나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거기에는 알라의 얼굴이 있다."라고 신은 말한다. 누구나 자기가 믿는 것을 칭송한다. 나의 신은 내가 만들어낸 것다. 그래서 신을 칭송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칭송한다는 뜻이다.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은 남의 믿음을 나무라지 않는다. 남의 믿음을 싫어하는 것은 무지해서다.
- 이븐 알 라비 (p 485)
신에 대한 일련의 지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신앙인 것처럼 여기는 전통은 겨우 18세기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읽어 가면서 정말 얼마나 위안을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p 491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나를 던진다." 믿으려면 먼저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지 일신론자들이 신이라고 부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도라고, 브라만이라고, 열반이라고 부르는 거룩한 자리를 내면에서 만날 수가 있다. -p 492
인간은 타인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신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집으로 맞아들여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없는 호의를 베푸는 자비를 실천한 덕분에 아브라함은 신과 바로 만날 수 있었다. -p 495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유명한 유명한 일화
웃달라카라는 현자가 신성이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고 아들 스베타케투한테 물이 든 큰 잔에 소금 덩어리를 넣으라고 시킨다. 아침이 되니 덩어리는 사라지고 소금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잔 전체로 퍼져나가서 맛으로 느낄 수가 있다. "얘야." 웃달라카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브라만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있다. 이 으뜸 가는 알맹이를 온 우주는 나로서 품고 있다. 그것은 실재요, 나요, 바로 너다." 우리는 신성한 차원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 거기에는 물론 사람도 포함된다 - 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의무가 있다.
- p 506
'Religion & Spriritual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등종교 (0) | 2020.05.14 |
---|---|
교회 밖 하나님 나라 (0) | 2020.04.30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 23~33) (0) | 2020.04.25 |
광야에서 (0) | 2020.04.19 |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0) | 2020.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