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많은 해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한류의 성장과 발전을 증명하듯이 최근 봉준호 감독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 최우수작품상 4개 부문에서 수상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단일 영화로 4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쥔 것은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역사항 처음이라고 하니 한국 영화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은 역사에 남을 한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 기쁜 소식과 함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이다. 봉준호 감독은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함께 후보에 올랐던 다른 감독들이 너무도 훌륭하신 분들이라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도 영광인데 수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그리고 자신이 영화를 공부하면서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이 함께 후보에 오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라고 하면서 그의 말을 소개하였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2020년 오늘, 한국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이 가슴에 새겼다고 하는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모든 작가들이 공감할 것 같은 말이다. 하지만, 아주 짧지만, 매우 함축적인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몇마디 말로 설명하거나 정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5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를 만나고자 한다. 미켈란젤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한 명이므로 분명히 답을 줄 것 같아서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여기에서 '개인적'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나요?
그럼 이제 미켈란젤로를 만나러 가자. 우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로 가야한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르네상스는 대략 1350년경부터 1550년경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지식을 재조명하고 살리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예술가로서 미켈란젤로의 활동영역은 조각, 회화, 건축, 도시계획으로 광범위했고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했다. 불후의 명작으로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과 같은 그림도 남겼지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은 조각가로 생각한 예술가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고 몸이 아프던 어머니가 6세 때 죽으면서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유모의 집에서 자란 미켈란젤로는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어서 어려서부터 돌과 망치를 가지고 놀았고 채석장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외골수적인 성격 때문에 어릴 적에 친구와 싸우면서 코뼈가 주저 않는 상처를 입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던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3살 무렵 1488년 당시 피렌체 최고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도제로 입문하였다. 도제로 공부하던 중 메디치 가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메디치가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그가 수집한 고대 조각을 모방하고, 고대 사상과 신화 등을 배우며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쌓게 된다.
미켈란젤로가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며 연구하고 배우고자 한 예술가는 조토(Giotto di Bondone,1267~1337)와 마사초(Masaccio, 1401~1428)였다. 전자는 중세의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 사실에 근거한 리얼리즘 회화를 탄생시켰고,후자는 이를 바탕으로 르네상스 회화를 탄생시킨 선구자다. 미켈란젤로는 이들에게서 회화는 보이는 것의 모방이 아니라 내용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임을 배우고 두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연구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미켈란젤로는 고전에 대한 충실한 이해 위에 자신의 개인적 사유, 고뇌, 철학, 신앙 등 자신만의 생각과 관점을 반영하여 재해석한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89세까지 살았고 죽기 직전까지도 정과 망치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작가이다.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기의 이탈리아는 외세의 침략, 전쟁, 종교개혁 등이 일어난 격변의 시기였다.
- 1494년 프랑스의 침공
- 1517년 루터의95개 조 반박문 종교개혁
- 1527년 독일 황제 군의 침략
- 1530년 스페인군의 피렌체 포위, 함락
오랜 세월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 자신을 둘러싼 환경만큼이나 미켈란젤로 개인의 내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타협하지 않는 투철한 작가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그는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와 자기 혁명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그의 작품에 담았다. 우리는 다음에 이어질 글을 통해서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다섯 작품을 만나고 그의 얘기를 들어 볼 것이다. 어떻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
1. 피에타 (1501~4)

2. 다비드(1501~4)

3. 천지창조(1508~1512)

4. 최후의 심판(1534~41)

5. 론다니니 피에타(1552~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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